자아는 무지에서 비롯된 환상이다.
자아는 무지에서 비롯된 환상이다
이 모든 감정과 그로 인해 일어나는 결과들은 오해에서 생기고, 이 오해는 단 하나의 근원이자 모든 무지의 뿌리,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나온다.
우리는 각각이 하나의 자아, 즉 '나'라는 실체가 있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자아는 단지 또 하나의 오해일 뿐이다. 일반적으로 견고한 실체처럼 느껴지는 자아의 관념은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이 관념을 일관성이 있고 실재하는 것으로 본다. 손을 들면서 우리는 '나는 이런 모습이다'라고 생각한다. '나에게는 모습이 있고, 이것이 내 몸이다'라고 생각한다. '모습이 나다, 나는 키가 크다'라고 생각한다. 가슴을 가리키며 '나는 이 모습으로 산다'라고 생각한다.
느낌, 지각, 행동에 대하여도 우리는 같은 일을 한다. '나는 느낌들을 갖는다. 나는 내 지각들이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몸속이건 밖이건, 자아라고 할 수 있는 독립된 실체를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불의 고리의 광학적 환영처럼 자아는 환영이다. 그것은 오류이고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고 궁극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불의 고리에 빠지듯이 우리는 자아라는 생각에 빠진다. 몸, 느낌, 지각, 행동 하나하나가 '나'라고 생각하는 것의 여러 가지 요소들임을 안다. 그러나 그것들을 조사해 보면, '내'가 그 어느 것에도 머물지 않음을 발견하게 된다.
자아라는 그릇된 생각에 매달리는 것은 무지에서 비롯된 우스운 행동이다. 그것이 무지를 영속화하고 모든 종류의 고통과 실망으로 이끈다. 삶에서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떻게 지각하느냐에 달려 있다. 따라서 이 지각이 오해에 근거하고 있다면, 불가피하게 그러하지만, 이 오해가 우리가 행하고 보고, 경험하는 모든 일에 스며든다. 이것은 어린애가 빛과 운동을 잘못 해석하는 것과 같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전 실존이 매우 취약한 전제 위에 근거한다는 말이다.
싯다르타는 자아가 없음을 발견하면서 본래 존재하는 악이란 없고 단지 무지만이 존재한다는 것도 알아냈다. 특히 '자아'라는 말을 만들고, 그 말을 전혀 근거 없는 합성된 현상에 붙이고, 그것에 가치를 두고, 그것을 보호하려고 고뇌하는 무지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싯다르타는 이 무지가 괴로움과 고통으로 바로 이어짐을 발견했다.
무지는 사실을 모르는 것, 사실을 잘못 알고 있는 것, 불완전한 지식을 갖는 것이다. 이 모든 형태의 무지가 우리를 오해, 그릇된 해석, 과대평가와 과소평가로 이끈다. 친구를 찾고 있는 와중에 멀리서 그 친구를 보았다고 하자. 가까이 가보니 허수아비를 친구로 잘못 보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신은 틀림없이 실망할 것이다. 장난기 있는 허수아비나 친구가 몰래 당신을 속여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당신 자신의 무지가 당신을 배반한 것이다. 무지에서 비롯하는 모든 행동은 투기와 같다. 전혀 알지 못하거나 충분히 알지 못하고 행동에 나서지만 거기에 자신할 만한 근거는 없다. 우리의 근본적인 불확실성이 이러한 모든 이름 있는 그리고 이름 없는 인식된 그리고 인식되지 않은 감정들을 불러일으키고 만들어낸다.
계단 꼭대기까지 오르리라고, 비행기가 무사히 목적지에 착륙하리라고 자신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우리가 무지의 행복을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복은 오래 지속하지 않는다. 무지의 행복은 확률의 기회가 항상 바라는 대로 실현되리라는 과대평가와 실현을 막는 장애에 대한 과소평가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원인과 조건들이 합쳐져 우리가 예상했던 일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종류의 성공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 일은 그렇게 되었어야 했고, 우리들의 가정이 정당했다는 증거로 그 성공을 이용한다. 매번 가정할 때마다, 예컨대 나는 나의 배우자를 알고 있다고 가정할 때마다 우리는 자신을 드러난 상처처럼 공개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나 어떤 것에 의존하는 가정과 기대는 우리를 상처받기 쉽게 만든다. 어떤 순간에도 가능한 많은 모순들 중 하나가 튀어나와 우리의 가정에 소금을 뿌려 우리로 하여금 주춤하고 울부짖게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