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가르침 (經,律,論)

인간의 마음은 본래부터 청정한가? (2) -마성스님

隱松 2023. 9. 11. 12:17

인간의 마음은 본래부터 청정한가? (2)

대중부와 분별론자들이 주장한 ‘심성본정설(心性本淨說)’과 똑같은 내용이 <앙굿따라 니까야(Aṅguttara Nikāya, 增支部>의 ‘하나의 모음(Eka nipāta)’에 나온다.

“비구들이여, 이 마음은 빛난다. 그 마음은 객으로 온 번뇌로 오염된다.”
(pabhassaram idaṃ bhikkhave cittaṃ tañ ca kho āgantukehi upakkilesehi upakkiliṭṭhan ti) (AN.Ⅰ.10)
“비구들이여, 이 마음은 빛난다. 그 마음은 객으로 온 번뇌에서 벗어난다.”
(pabhassaram idaṃ bhikkhave cittaṃ tañ ca kho āgantukehi upakkilesehi vippamuttan ti) (AN.Ⅰ.10)

위 내용은 전체 니까야 가운데 오직 <앙굿따라 니까야>의 이 부분에만 나타난다. 그런데 이 경과 대응하는 한역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에도 이 내용은 나타나지 않는다. <앙굿따라 니까야>는 상좌부에서 전승한 것이고, <증일아함경>은 대중부에서 전승한 것이다.

<앙굿따라 니까야 주석서(Manorathapūraṇī, 增支部註)>에 따르면, ‘빛난다(pabhassara)’라는 것은 희고 깨끗하다(paṇḍaraṃ parisuddhaṃ)는 뜻이다. 여기서 말하는 ‘마음’은 ‘바왕가의 마음(bhavaṅga-citta, 有分心)’이다. 그러면 마음은 색깔이 있는가? 없다. 푸른색 등에는 어떤 색깔이 있겠지만 색깔이 없는 것은 깨끗하므로 빛난다고 설한다. 그리고 이것은 번뇌가 없으므로 깨끗하다고 해서 빛난다고 말한다.(AA.i.60) ‘객으로 온 것(āgantuka)’이란 [바왕가의 마음과] 함께 생기지 않고(asahajāta) 나중에 속행의 순간(javanakkhaṇe)에 생긴 것이다. 즉 탐욕‧성냄‧어리석음의 번뇌로 마음이 오염된다는 뜻이다. 마치 계를 지키고 바른 행실을 갖춘 부모나 스승이 계를 지키지 않고 행실이 나쁘고 서계(誓戒)를 갖추지 못한 아들이나 제자의 나쁜 행위로 인해 불명예를 얻는 것과 같다. 여기서 ‘바왕가의 마음’을 계를 지키고 바른 행실을 갖춘 부모나 스승에 비유했다. 또한 ‘벗어난다(vippamutta)’라는 것은, 속행의 순간에 탐욕‧성냄‧어리석음의 여읨이라는 세 가지 조건을 가진 지혜와 함께한 유익한 마음이 일어날 때, [바왕가의] 마음은 객으로 온 번뇌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마치 계를 지키고 바른 행실을 갖춘 아들이나 제자로 인해 부모나 스승이 잘 훈계하고 교계(敎誡)했다고 명성을 얻는 것과 같다. 즉 속행의 순간에 일어난 유익한 마음으로 인해 이 바왕가의 마음은 객으로 온 번뇌에서 벗어났다고 설한다.(AA.i.61)

이상에서 보듯, 위에서 인용한 두 문장은 <앙굿따라 니까야>의 편찬자가 후대에 삽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위 내용은 마음에 관해 설한 붓다의 기본 교설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이 주석서에서는 ‘그 마음’을 ‘바왕가의 마음(bhavaṅga-citta, 有分心)’이라고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분심(有分心)’ 혹은 ‘유분식(有分識)’이라는 용어는 부파불교 시대 상좌부에서 윤회의 주체로 상정한 개념이다.

부파불교 시대에는 각 부파에서 윤회의 주체를 상정했다. 즉 독자부의 보특가라(補特伽羅), 화지부의 궁생사온(窮生死蘊), 경량부의 일미온(一味蘊)과 종자상속설(種子相續說), 상좌부의 유분식(有分識), 설일체유부의 명근(命根), 대중부의 근본식(根本識), 그리고 대중부나 분별론자들이 주장한 세심(細心) 등이다.(히라카와 아키라, 이호근 옮김, <印度佛敎의 歷史(下卷)>, 민족사, 1991, p.78) 특히 상좌부에서는 잠재심(潛在心)인 유분식(有分識, bhavaṅga-viññāṇa)을 상정하고 있다. 이 유분식이 윤회의 주체라고 단정하지는 않지만, 재생 연결식으로서 목숨이 끝날 때 다음 생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이처럼 각 부파에서는 자신들의 교리체계 내에서 무아(無我)‧윤회(輪迴)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오온(五蘊)의 안과 밖에 별도로 독립된 자아가 존재한다는 어떠한 증거도 찾아내지 못했다. 왜냐하면 붓다는 ‘영원한 자아’ 혹은 ‘불변하는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붓다는 생전에 ‘바왕가의 마음’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다. 이것은 십이연기설을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로 해석한 붓다고사(Buddhaghosa)가 싱할라어로 전승되던 <앙굿따라 니까야>의 주석서를 빨리어로 번역하면서 이 부분을 삽입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대림 스님도 이 부분을 번역하면서 각주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런 본자청정 객진번뇌의 가르침이 초기불교의 빠알리 삼장 가운데 오직 본서(앙굿따라 니까야)의 이 부분에서만 나타나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을 두고 초기경들에서도 부처님께서는 본자청정한 ‘영원불멸하는’ 마음을 설하신 것으로 확대해석하는 것은 참으로 곤란하다. 초기경들 전반에서 예외 없이 마음은 항상 연기적 존재이고 조건발생이고 연이생(緣以生)일 뿐이라서 이러한 마음은 대상 없이는 일어나지 못하는 조건생‧조건멸이고, 찰나생‧찰나멸이다. 그래서 바로 위의 경에서 마음은 너무나 빨리 변하기 때문에 비유를 들 수조차 없다고 하셨다. 마음을 불변하는 그 무엇으로 상정해버리면 그것은 즉시에 외도의 자아이론과 같아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대림 옮김, <앙굿따라 니까야> 제1권, p.88, n.45)

이처럼 대림 스님은 붓다가 ‘영원불멸하는’ 마음을 설한 것이라고 확대해석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왜냐하면 마음은 대상 없이는 일어나지 못하는 찰나생(刹那生)‧찰나멸(刹那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변하는 마음이 있다고 상정하면 외도의 자아 이론과 아무런 차이가 없게 된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붓다는 인간의 마음이 본래부터 청정하다거나 청정하지 않다거나 직접적으로 언급한 적이 없다. (계속 이어짐)
2023. 9. 9.
사문 마성(摩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