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의 경지에 대하여..
<앙굿따라 니까야>의 ‘짜라 숫따(Cara-sutta, 行經)’(AN4:11)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비구들이여, 만일 비구가 걷고 있는 동안에(… 서 있는 동안에 … 앉아있는 동안에 … 잠들지 않고 누워있는 동안에) 감각적 욕망에 관한 생각과 악의에 관한 생각과 남을 해치고자 하는 생각이 일어난다면, 만일 그가 그것을 품고 있고 버리지 않고 제거하지 않고 끝내지 않고 없애지 않는다면, 비구들이여, 만일 비구가 이런 상태로 걷고 있다면(… 서 있다면, … 앉아있다면, … 잠들지 않고 누워있다면), 그를 일러 근면하지 않고 창피함이 없고 언제나 한결같이 게으르고 정진이 부족하다고 한다.”
“비구들이여, 만일 비구가 걷고 있는 동안에(… 서 있는 동안에 … 앉아있는 동안에 … 잠들지 않고 누워있는 동안에) 감각적 욕망에 관한 생각과 악의에 관한 생각과 남을 해치고자 하는 생각이 일어난다면, 만일 그가 그것을 품지 않고 버리고 제거하고 끝내고 없앤다면, 비구들이여, 만일 비구가 이런 상태로 걷고 있다면(… 서 있다면, … 앉아있다면, … 잠들지 않고 누워있다면), 그를 일러 애쓰고 창피함이 있고 언제나 한결같이 열심히 정진하고 스스로 독려한다고 말한다.” (AN.II, pp.13-14)
위 내용은 수행자가 가고 [行]‧서고[住]‧앉고 [坐]‧누워 [臥] 있는 동안에 감각적 욕망에 관한 생각(kāma-vitaka), 악의에 관한 생각(vyāpāda-vitaka), 남을 해치고자 하는 생각(vihiṃsā-vitaka)이 일어날 때, 즉각 그것을 없애지 않는다면 게으른 자이고 정진하지 않는 자이다. 반면 그러한 생각이 일어날 때, 즉각 그것을 없앤다면 게으르지 않고 정진하는 자라는 것이다.
또 다른 경(AN4:14)에서 붓다는 ‘율의근(律儀勤, saṃvara-padhāna)’을 닦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 어떤 것이 율의 근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눈으로 형상을 봄에 그 표상[全體相]을 취하지 않으며, 또 그 세세한 부분상 [細相]을 취하지도 않는다. 만약 그의 눈의 감각기능[眼根]이 제어되어 있지 않으면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이라는 나쁘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이 그에게 물밀듯이 흘러들어올 것이다. 따라서 그는 눈의 감각기능을 잘 단속하기 위해 수행하며, 눈의 감각기능을 잘 방호하고 눈의 감각기능을 잘 단속하기에 이른다. 귀로 소리를 들음에…, 코로 냄새를 맡음에…, 혀로 맛을 봄에…, 몸으로 감촉을 느낌에…, 마노[意]로 대상[法]을 지각함에 그 표상을 취하지 않으며, 그 세세한 부분상을 취하지도 않는다. 만약 그의 마노의 기능[意根]이 제어되어 있지 않으면 탐욕스러움과 정신적 고통이라는 나쁘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이 그에게 물밀듯이 흘러들어올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노의 기능을 잘 단속하기 위해 수행하며, 마노의 기능을 잘 방호하고, 마노의 기능을 잘 방호하여 잘 단속하기에 이른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율의 근이라 한다.”(AN.II, pp.16-17)
이상에서 보듯, 초기불교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의식(無意識)이나 잠재심(潛在心)보다는 겉으로 드러난 표면심(表面心)을 잘 제어하라고 가르친다. 그래야 몸과 입과 뜻으로 불선법(不善法)을 행하지 않고, 선법(善法)을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함부로 선사들의 말을 빌려 본래 닦을 것도 없고, 그대로 무심(無心)이며, ‘평상심이 곧 도[平常心是道]’라는 말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내뱉는다. 물론 그런 경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체험해 보지 못하고 죽는다. 왜냐하면 전혀 번뇌가 없는 경지는 구차제정(九次第定) 중에서도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이나 멸진정(滅盡定)이기 때문이다. 그런 경지에 도달한 이를 일러 ‘참사람[眞人]’, ‘대자유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경지를 몸소 체험해 보지 못한 자가 그런 말을 함부로 한다면, 그 사람은 ‘대망어죄(大妄語罪)’를 범한 것이 된다. 수행의 경지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 페이스북에 쓸데없는 글을 올리는 자가 올바른 수행자일 리가 없는 것과 같다.
2023-10-16
마성(摩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