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가르침 (經,律,論)

생활과 수행의 관계

隱松 2023. 10. 24. 21:58


재가자가 일상생활 속에서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 많은 사람이 생활과 수행을 둘로 구분합니다. 그러나 생활이 곧 수행이고, 수행이 곧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생활 따로 수행 따로’로 분리되면, 아무리 오랫동안 불교를 신행해도 자기 삶에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불교는 다른 종교와 달리 자신의 노력으로 가치 있는 삶으로 가꾸어야 합니다. 즉 향상일로(向上一路)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불교의 수행은 삼학(三學)의 체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삼학이란 지계(持戒, sīla)‧선정(禪定, samādhi)‧지혜(智慧, paññā)를 말하는데, 깨달음을 이루고자 하는 자가 반드시 닦아야 할 세 가지 수행이라는 뜻입니다. 지계는 계율을 잘 지켜 실천하는 것이고, 선정은 마음을 집중시켜 산란하지 않게 하는 것이며, 지혜는 세간과 출세간의 진리를 꿰뚫어 아는 것입니다.

초기불교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삼학 중에서 지계를 가장 중요하게 여깁니다. 왜냐하면 도덕적 기초 없이는 어떠한 정신적 발전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도덕적 규범은 더 높은 정신적 성취를 위한 불가피한 기반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사실 출가‧재가를 막론하고 도덕적으로 청정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하여 정신을 통일‧집중시킬 수 없습니다. 마음이 산란한 상태에서는 어떠한 지혜도 나올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계를 지킨다는 것은 ‘도덕적 행위’를 실천한다는 뜻입니다. 지계(持戒)를 다른 말로 ‘심신(心身)의 조정(調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신의 조정이란 몸과 마음의 컨디션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계를 지킴으로써 건강한 신체와 건전한 정신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몸과 마음을 조절하는 것을 지계라고 합니다.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신체적으로 건강하고, 정신적으로는 안정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어떤 일을 하더라도 완벽하게 처리할 수 있게 됩니다.

이를테면 수면 부족이라든가, 과로라든가, 과식이나 폭음이라든가, 질병이나 부상 또는 정신 쇠약 때문에 신체의 컨디션이 나빠지거나, 어떤 부도덕한 행위나 불의를 행하여 마음의 부담이나 불안 등이 생기면 마음이 안정되지 않습니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으면 정신을 통일‧집중시키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통일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신체의 컨디션이 양호하고 정신상태가 안정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처럼 몸과 마음을 최상의 상태로 조정하는 것을 지계라고 합니다. 따라서 지계는 반드시 윤리‧도덕적인 선행(善行)을 실천하는 것뿐만 아니라 여기에 덧붙여 건강한 신체와 건전한 정신도 포함됩니다. 선한 습관이 붙은 건강한 육체와 건전한 정신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바로 지계입니다. 이처럼 지계가 먼저 확립되어야만 비로소 선정을 쉽게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추가한다면, 수행 공간이 청결해야 합니다. 주변 환경이 잘 정돈되어 있지 않으면 마음이 산란해집니다. 정신을 집중하는 데 큰 장애가 됩니다. 불필요한 물건을 많이 소유하지 않는 것이 번뇌를 줄이는 지름길입니다. 즉 간소한 생활이어야 비로소 심오한 사색이 가능해집니다. 그러므로 잡다한 잡동사니들이 눈에 띄지 않도록 정리 정돈만 잘해도 번뇌를 절반으로 줄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계를 바르게 지킴으로써 정신 통일의 선정을 얻을 수 있고, 바른 선정을 얻음으로써 충분한 지혜를 얻을 수 있으며, 또 그 기능을 완전히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속적인 일에서도, 계‧정‧혜 삼학을 갖추는 것은 매우 필요한 일입니다. 사무나 사업을 순서대로 척척 처리해 나가는 사람은 이와 같은 세속적인 의미의 삼학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삼학은 일반 사회생활에서도 필요할 뿐만 아니라 불교의 수행에서도 근간이 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치유와 명상’이라는 말이 너무 많이 남용되고 있습니다. 이곳저곳에서 치유와 명상을 소개하는 광고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유튜브(Youtube)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수행하는 모습을 찍은 동영상이나 사진들이 너무 많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이른바 ‘보여주기식’ 수행들입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공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여주기식’ 수행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거짓 수행이므로 인격 향상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또한 재가자가 수행한다고 가정생활을 내팽개치고, 종일 수행 센터에 앉아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며, 권장할 일도 아닙니다. 일상생활, 즉 청소하고 빨래하고, 음식을 만드는 모든 행위 자체를 알아차리기만 하면, 그것이 곧 수행입니다. 특별히 ‘앉음 수행[坐禪]’이나 ‘걸음 수행[行禪]’을 해야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생활 속에서 알아차림과 깨어있음[正念正知]의 삶이야말로 진정한 수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틱낫한 스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나는 내가 죽음이라는 속성을 가진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세월을 피할 수 없으므로 늙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육신을 가지고 있어서 병도 피할 수 없습니다. 내가 지금 아끼고 소중히 여기며 집착하는 모든 것은 언젠가 버려야 할 것들입니다.”

2023. 10. 24.
摩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