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6. 28. 12:46ㆍ사유(思惟)
데카르트의 "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어원은
철학자 성 아우구스티노의 인식론과 존재에 대한 회의에서 비롯된 말로 보는 게 적당하다. 아우구스티노는 인간의 감각이 인간을 속일 수 있으며(찬 물인데 뜨겁다고 느끼거나, 미지근한 물도 뜨겁다고 순간 생각하는 등), 또한 상대주의(똑같은 온도의 물에 대한 사람들의 제각각 다른 인식 같은 것)에 의해 객관적 진리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시에 아우구스티노는 이러한 상대주의, 회의주의를 극복하고자 했고, 진리가 무엇이든 간에, 적어도 지금 내가 물이 따뜻하다고 느낀다면, 그 인식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참된 것이다라는 쪽으로 진리의 방향을 선회시켰다. 따라서 감각의 속임수로 인해 회의주의가 성립하는 것을 반박하면서, 만일 내가 진리를 잘못 알고 있다면 (또는 인식을 잘못하고 있다면), 나는 존재한다. (Si enim fallor, sum)라는 명제를 도출했다. 이는 감각에 속으면서 의심하는 것, 그리고 스스로가 진실에 대해 의심하는 것을 인식하는 행위가 자신의 나의 존재를 확실하게 증명한다고 말했다.

불교의 무아설은 불교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대표적 이론이다. 모든 존재는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영원한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 무상설과 함께 무아설은 불교 이전 인도의 전통 사상에서 절대적 자아로 간주되었던 '아트만' 개념에 반대해서 생겼다. 석가모니는 절대적 자아가 존재한다고 생각함으로써 이기심이 생기고 이 이기심은 서로의 평화로운 삶을 해치는 근본적인 장애물이 된다고 보았다. 즉 보통 사람은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과 자신이 가진 것이 영원할 줄 알고 거기에 집착하며 이 집착 때문에 여러 가지로 고통을 받는다. 그러나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존재는 없으며 이 존재에 대한 참모습을 바로 알게 되면 집착하는 마음을 다스릴 수 있기 때문에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다만, 고정된 정신('나'라는 개념: 아트만)이 없다는 것이지, '내 몸' 자체가 없다는 뜻은 아님에 주의. 이를 잘못 받아들이면 허무주의에 빠질 위험성이 있으며 실제로도 이런 상황에 빠지는 불자들도 많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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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행무상. 그 바탕에 기준을 두고 보면 비교가 여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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