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종교

2023. 6. 18. 07:15여러 가르침 (經,律,論)

고타마 붓다의 '다르마(법)'는 그의 명상적 증명을 통해서 전혀 다른 사실을 보게끔 해준다. 신앙의 견해와 정반대로, 삭까야는 철두철미하게 '나'가 아니고, 따라서 '영혼'이란 매개체는 필요 없을뿐더러 삭까야 안에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고타마 붓다의 명상으로 아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한다. '영혼'에 입각한 신앙은 탐·진·치의 '치', 즉 '미혹'의 종교요 무지의 종교이지 '깨달음'의 종교가 아니다..

반면 고타마 붓다의 종교는 '깨달음'의 종교이다. 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고타마 붓다의 명상이 필수 불가결하다. 고타마 붓다의 제자, 즉 '불자佛子'라고 하는 말은 '고타마 붓다의 명상을 하고 있는 사람'과 동의어이다. 아무리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부르고 부처님을 믿고 또 어떠한 불사를 하고 신심을 가졌다 하더라도, 고타마 붓다가 가르친 명상 이론을 모르고 명상 수행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적어도 고타마 붓다의 진실한 제자와는 거리가 멀다.

우리는 여기서 '공空'에 관한 더 쉽고 명확한 정의를 다시 한번 반복해 볼 필요가 있다. 공을 표현하는 우리말은 '비어 있음'이다. 그러나 공은 텅 비어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 있는 것'이 있을 뿐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그 무엇’은 없다는 말이다. 이 절묘한 언어의 마술이 한글 속에 담겨 있다.

중국인들은 그 위대한 한문을 가졌으면서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소 옹색한 표현을 한다. 그들은 '참다운 공은 진실한 있음이다(진공묘유眞空妙有) '라고 말한다. 이것은 공을 허무로 파악하는 일부 지식인들에 대한 경고이겠지만, 있느냐 없느냐의 이분법적 논리에 젖어온 지식인들로서는 또다시 알쏭달쏭해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상윳따니까야》 (S5:10)에 나오는 와지라 비구니와 마라의 대화를 또 한 번 들어보자.

마라-

누가 중생을 창조하였는가?
중생을 창조한 자는 어디에 있는가?
중생은 어디에서 생겼는가?
중생은 어디에서 소멸하는가?

와지라 비구니-

왜 그대는 중생이라고 상상하는가?
마라여, 그대는 견해에 빠졌는가? 단지 형성된 것들의 더미일 뿐 중생이라고 할 만한 것을 찾을 수 없도다. 마치 부품들을 조립한 것이 있을 때 '마차馬車'라는 명칭이 있는 것처럼, 오온의 무더기들이 있을 때 중생이라는 인습적 표현이 있을 뿐이다. 단지 괴로움이 생겨나고 단지 괴로움이 머물고 없어질 뿐이니, 괴로움 외에 어떤 것도 생겨나지 않고 괴로움 외에 어떤 것도 소멸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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