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7. 2. 07:27ㆍ여러 가르침 (經,律,論)

20여 년 전의 일입니다. 당시 저는 여러 스님과 함께 선방 생활을 하고 있었어요. 백양사 운문암이라고 하는 산속의 작은 암자였는데, 스무 명 정도가 방 하나에서 함께 잠도 자고 밥도 먹고 참선도 하는 곳이었죠. 가지각색의 다양한 스님들이 오로지 참선 수행을 위해 모였어요. 저는 일찍 출가를 한 편이지만, 늦게 출가한 스님 중에는 자기주장이 강하고 개성이 뚜렷한 분이 많아요. 대개 부모와 친구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인연의 끈을 끊어내며 출가한 분들이니까요.
그런 스님들 스무 명과 석 달 동안 한방을 쓰고 대중 생활을 한다고 하니까 처음엔 굉장히 조심스러웠어요. 제 나름대로 둥글어질 준비를 했습니다. 산속의 돌은 날카로운 상태 그대로인데, 바닷가의 돌은 서로 부딪쳐서 날 선 부분이 다 깨지고 둥글둥글해지잖아요. 그게 바로 대중 생활이라고 할 수 있죠. 함께 방을 쓰다 보면 각각의 날카로운 부분이 부딪치고 깨지기 마련입니다. 그걸 두려워해서는 안 돼요. 깨지는 아픔이 있어야 둥글어지고 함께 더불어 살게 되는 거죠.
그런데 함께 방을 쓰는 스님 중에 말도 행동도 무척 거친 분이 있었어요. 어느 날 혼자 암자 둘레를 산책하는데, 저쪽에서 그 스님이 다가오는 거예요. 순간 다른 방향으로 몸을 트는 나를 발견했어요. ‘왜 내가 저 스님을 피했지?’ 그때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죠. 저도 모르게 저 스님하고 가까이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런 마음이 있으니 늘 그 스님과 거리를 두고 생활했고, 심지어 여럿이 앉아 차를 마셔도 그 스님께는 제일 늦게 주곤 했던 거죠. 당시에는 스스로 그런 행동을 하는지도 몰랐어요. 하지만 생각이 자연스레 행동으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방으로 돌아와 그 화두를 붙잡고 오래도록 참선을 했습니다. 내 안에 ‘스님이라면 응당 이러해야 한다’는 틀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어느 날 문득, 옆에서 묵묵히 정진하는 그 스님의 마음이 오롯이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스님은 조금 늦게 출가를 했거든요. 나이가 들어 출가하게 되면 고민이 더 많을 수 있잖아요. 살면서 깊이 맺어온 관계를 떨치고 출가한다는 게 힘들고요. 그러니까 나보다 훨씬 어렵게 큰마음을 내어 수행하고 있는, 그런 마음이 읽히는 거예요. 내 멋대로 바라보고 쉽게 판단 내린 마음이 아니라 그 스님의 마음이 있는 그대로 느껴졌어요.
그러자 차례로 옆에 있던 다른 스님들도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한 분 한 분의 마음이 느껴지면서 고마움이 밀려왔습니다. 이분들 덕분에 내가 이 자리에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비로소 내가 생각하는 틀이 조금 깨진 것을 느꼈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소나무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소나무가 많은 산은 기개가 넘치고 멋들어진 진짜 산처럼 보이고, 소나무가 없는 산은 힘이 없다고 생각해서 눈길조차 안 줬어요. 산책하다 쉴 때도 무심코 소나무 밑에 앉아 있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깨달음을 얻고 나서 밖으로 문을 열고 나왔는데, 숲에 있는 나무들이 전부 다 눈에 들어왔어요. 모든 나무가 다 반가운 거예요. 단풍나무는 단풍나무대로, 참나무는 참나무대로, 비자나무는 비자나무
비자나무대로, 그 하나하나의 특징과 아름다움이 느껴지고 그 나무가 내게 주는 것들, 시원한 바람과 맑은 공기와 새들이 노래하는 소리를 전부 느낄 수 있었어요. 내가 나무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 나무들이 하나하나 있는 그대로 다가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문득 눈물이 주룩 흘렀어요. 동백나무를 만나도 후박나무를 만나도 단풍나무를 만나도 너무나 좋고 기쁜 거예요. 소나무 한 그루 봤던 때의 기쁨보다 수천, 수만 배의 기쁨을 느끼게 된 거죠. 차별하는 마음은 내가 선택한 하나만 좋고 나머지는 싫어하는 것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스스로 삶을 괴롭게 만드는 첫걸음이죠. 차별하는 마음은 그 뿌리가 깊어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제 안에 붙어 있던 차별심이 조금 떨어져 나간 그날의 경험 이후로 저의 삶은 훨씬 더 자유로워졌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틀을 버리고 내가 만들어낸 나를 떠날 때 비로소 진짜 나를 만날 수 있습니다.
금강스님(전 미황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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